수십 번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을 붙잡고 아무리 숨을 참아 보아도 정도 이상으로 뛰는 심장은 본래의 속도로 돌아가려 하지 않으니, 애써 침착한 체 무딘 낯을 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밴시의 울음 소리라고 칭한다 들었다. 나뭇잎 가르며 들려 오는 바람 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았다.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는 양 겁에 질린 표정을 감출 길이 없다. 아니다, 쫓기고 있지 않다. 아니, 아니다. 쫓기고 있다. 또다시, 아니다. …나를 지금 쫓는 것은 없다. 커다란 나무 줄기에 몸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느리게 주저앉았다. 등을 온전히 받쳐 주는 것이 있으니 안심이 되어, 점차 잦아들기 시작하는 심장을 갈무리하며 잠시간 눈을 감았다. 놓칠 새라 힘 주어 잡고 있던 지팡이를 천천히 손에서 떼어낸다.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몇 달 새 낯설어진 감각에 생경해하며, 지팡이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두렵지 않아. 

  주문 외듯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두렵지 않아. 더이상 두려워할 것은 없어. 나뭇잎 사이로 고양이 발자국 같은 달빛이 소리내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시금 몸을 일으켜 어두운 숲 속을 가로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저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갈 생각이 없습니다."

  아침 식사 중 대뜸 내뱉은 한 문장 말이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누구 하나 무지하지 않았으니 '같은 길을 갈 생각이 없다'는 말을 들은 그의 양친은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아들의 철없는 치기라 판단하기에 그들의 아이는 이미 장성해 있었으며, 말하는 이의 표정과 목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뚜렷했으니.

"그러니 저는 독립하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달그락, 식기 내려놓는 소리가 정도 이상으로 크게 들려온다. 꼭 닮았으나 자신을 낳지 않은 아버지의 얼굴이 새파랗게 불타오르는 광경을 온전히 눈에 담으며 그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조금 더 길어지겠어, 퍽이나 태평한 생각이다.
  머글식 폭력은 경박하다며 사용하는 이들을 경멸하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멀지 않은 거리서 다가와 망설임 없이 아들의 뺨을 올려 붙였다. 지팡이를 빼앗는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라, 명하는 말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순순히 방으로 들어가니 마법을 사용하여 모든 문을 잠궈 버리는 것이, 참 온건하고도 관대한 처벌을 주는구나 생각했다. 유약한 인간의 손으로 마법 없이 파훼할 수 있는 잠금쇠가 아니었다. 여보, 여보. 잠시만요. 당황하여 안절부절 못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 온다. 방문 앞에 서서 점차 멀어지는 그 목소리들을 귀 기울여 들어 보다가, 모든 소리가 잦아든 이후 느지막이 발걸음을 떼어내었다. 방 한 켠에 걸려 있는 거울에 시선이 닿았다. 볼품없이 부어올라 있는 얼굴이 보인다. 아, 소리내어 입을 벌려보니 그제서야 아릿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뺨을 맞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따지자면, 폭력을 체험한 것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낯선 감각이다. 찌르르 울리는 고통이 낯설면서도 마냥 참지 못 할 것은 아니었기에 아무런 조치 하나 취하지 않은 채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버렸는데 기한 모를 유예가 더 늘어났다. 창문조차 열 수 없어 잠겨 버린 창틀을 몇 번 흔들어 보다, 우중충한 구름 낀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하늘이라 부르는 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상냥하다, 다정하다, 현실을 모른다. 듣기에 좋았던 수많은 형용사들을 떠올려 본다. 나는 마냥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미리 말을 해 둘 걸 그랬나. 의미 없는 생각만이 웅웅 맴돈다. 잠긴 방문 너머로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일 테다. 그러니 나는 마냥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 

"어머니."

  도리어 모르는 척 순한 얼굴을 가장하여 그 누구보다 약아빠진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자신이었다고, 미리 말을 해 둘 걸 그랬다. 여전히 의미 없는 후회일 뿐이다. 어쩌면,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들을 무척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아들이 한 발자국 바깥 나들이 하지 못 한 채 방에 갇혀 있는 것이 못내 서럽고 안타까우셨던 모양이었다. 매일같이 아버지를 설득하는 목소리를 방문 너머로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유리디스를 호그와트에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같잖은 친구 놀음에 붙잡혀 이상을 깨우치지 못 하고 철없는 소리나 하고 앉아있지 않나.' 그리 말하시며, '나는 저런 선택을 하는 이들을 잘 안다. 동정을 다른 감정으로 착각하여 저러는 것이지, 스스로 마음 깊이 반성하는 것이 아닌 이상, …….' 더이상 들을 가치가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부모님이 레질리먼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속 깊이 안심했다.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무릎 꿇고 울며 빌 정도가 되어야 자신의 말을 조금이라도 들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달리 말해 그는 아버지의 저 올곧음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정하셨기에.

"유리, 식사는 해야지. …몸이 안 좋니? 스프를 준비하라고 해 놓을까?"

  무작정 굶기 시작했다. 무식하고 멍청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입맛 없어요. 언제나 대답은 동일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으니까요. 혼잣말은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터였다. '네가 그런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어서 아버지에게 빌어! 잘못했다고 해!' 화를 내시기도 하고, '제발 이것만 먹자, 유리.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구나, 응?' 애원하기도 하셨다. 대답은 밋밋했다. '먹고 싶지 않아요.' 그럼 죽을 생각인 거니? '그런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않아요.' 약속한 것도 있고.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고명한 순수혈통 가문의 도련님이 아사로 죽었다는 사실이 바깥에 밝혀지면 아버지도 꽤나 속 썩이시겠거니, 싶었다. 딱히 그것을 노리지는 않았지만서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허나 아버지의 믿는 바를 따르려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거니 생각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 몸은 그 고명한 뜻에 의하여 죽음에 가까워진 나약한 육체였다. 눈총을 살 정도로 무식한 고집이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본다. 바라는 것은 나 자신의 죽음이 아니었다. 나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었으며, 육신은 좁은 방 안에 갇혀 있건만 정신은 이미 저 하늘을 떠돌고 있기에 몸 무거운 속박은 속박으로 자리할 수 없었다. 

"어머니."

  말라붙은 숨으로 애원하면.

"…나가고 싶어요."

  나를 사랑하는 당신은 그 요청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그 사랑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챈다. 자신이 그렇기에, 다른 이들도 그러리라 쉬이 판단하고 살아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한참 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 이 사람은, 나의  뜻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손 끝이 떨려왔다. 아직은 견딜 만 했다. 흔들리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정의롭고 올곧은 뜻을 지닌 사람만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용기 있는 사람만은 못 되어, 이것이 아닌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설득하며 납득시키려 수없이 자기합리화를 반복할 뿐이다. 상처 받은 얼굴이 보인다. 이기적인 나를 용서해주세요. 아니,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무 말 할 수 없어 몇 주만에 자신에게 되돌아온 지팡이를 힘 주어 잡아 볼 뿐이었다. 손이 가늘게 떨린다. 눈이 빛났다. 뒤돌아 자리를 뜨려는 당신을 불러 세웠다.

"…어머니."

  무엇인가 비틀어지는 소리가 난다.

"사랑해요."

  변함없이. 어쩌면 앞으로도 내내 변하지 않을 영원함으로. 

"먼저 갈게요."

  가장 먼저 이 지팡이를 부숴버려야겠다. 생각하며 벽에 걸려 있는 도톰한 망토를 걸쳐 입었다. 사랑을 볼모로 잡아 사랑하는 사람을 협박했다. 용서받지 못 할 죄란 이러한 행동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챙길 짐은 많지 않았다. 저 먼 곳으로 사라지는 어머니의 발소리를 음악 삼아 책상 서랍에 넣어 놓은 물건 몇 개를 마구잡이로 가방 속에 집어 던졌다. 쪽문을 통해 집을 나섰다. 스쳐 지나가는 담벽 아래, 언젠가 속수무책으로 잃어버렸던 작은 생명의 비석이 낮게 자리한 것이 보였다. 잘 있어, 프림. 마지막 인사를 한다. 꽃봉오리조차 맺히지 않은 장미 덩굴이 비석을 바닥 삼아 그 발을 딛어 오르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꽃이 피어나겠지. 어머니의 손길이 닿은 장미 화원은 틀림없이 아름다울 테다. 다시는 장미를 그리지 않을 테다. 몸 돌려 집을 떠났다. 어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밴시의 울음소리가 왕왕 귓가를 울렸다.


* * *

  몇 번의 순간이동을 반복하여, 까마귀 몇 마리 날아다니는 것이 고작인 다이애건 앨리의 구석진 거리. 망토를 푹 눌러 뒤집어 쓴 이는 푸른 보석 달린 지팡이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망설이듯 몇십 분 동안을 그와 비슷한 자세로. 지팡이는 흔적을 남긴다. 조금의 권력을 사용하여 마법의 흔적을 추적한다면, 아버지가 자신을 금방 찾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지팡이를 꺾어 내리는 마법사는 많지 않겠지.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지팡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뚝, 섬뜩한 소리가 났다.
  약 10년을 함께 한 사과나무 지팡이는 거짓말처럼 부러져 버렸다. 아니, 부러뜨렸다 칭하는 편이 더 옳을 테다. 뚝 부러지며 짧은 생 마무리하는 모습이 꼭 그 운명에 순응하여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서, 나무 부러진 조각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잔해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가 물려 주었다는 보석도 어김없이 땅 속에 묻혔음은 당연한 사실. 망토를 깊게 뒤집어 쓴 채 다이애건 앨리의 지팡이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나절 첫 손님이 될 이는 그렇게 같은 자리에서 두 시간을 서서 기다렸다. 아침을 여는 사람들의 소란이 들린다. 졸음 덜 깬 지팡이 장인은 느지막이 가게의 문을 열었다.
  두 번째 지팡이를 맞이하는 마법사들의 수는 생각보다 적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성장'이라 부르지요. 그러니 부디 다가올 새로운 시간들을 기쁘게 맞이하기를 바란다고, 지팡이 장인은 망설임 없이 이것을 그에게 건네 주었다. 아주 유연하되 고집스런 나무로 만들었다는 새로운 지팡이. 이것은 휘어질지언정, 더이상 부러지지는 않을 테다. 새로운 지팡이의 감각이 못내 낯설 뿐이다. 가진 것은 얼마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지 않고, 장소를 몇 번 더 이동하여…….


  문득 참기 힘든 외로움이 온 몸을 덮쳐 왔다. 난생 처음 보는 바다는 아름다웠으며, 고요했고, 다시 없을 만큼 공기가 시려웠다.


* 공미포 390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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