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불면을 앓았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만 사람의 소리 얼마간 들리는 것보다 아주 고요한 것이 오히려 잠을 더 쫓아내기 마련이라고,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방 안에 쌓여 있는 어둠은 좀처럼 그 침묵을 거두어내지 않았다. 그럴 때면 버릇처럼 과거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허공에 꺼내 보고는 했다. 온기 어린 공간 속 비주기적인 소음을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의 잔상과, 불특정 다수가 만들어 내는 펜촉의 소리들과, 작은 소동물이 카펫 깔린 바닥을 돌아다녀 남긴 흔적들, 문 닫지 않고 잠에 빠져들면 어느새인가 방에 들어와 멀지 않은 옆자리를 채우던 타인의 온기까지. 돌아갈 수 없기에 과거라 부르는 것이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그립고, 그것 그리는 습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추울 리 없는 방 안에 한기가 어린 듯 하다. 이불을 끌어모아 턱 끝까지 올려 덮어 보아도 오한이 가시지 않는다. 손 끝보다는 명치가 시렸다. 
  모를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외로웠다. 입 밖으로 내어 뱉으면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 혼잣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끌어안고 있으면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사라져 좋을 것 하나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기한 없는 바람만을 수없이 되뇌고,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를 끊임없이 꿈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창 밖으로 얼핏 보이는 달이 한 뼘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밤이 길다. 오전의 태양이 영영 떠오르지 않을 것처럼 어둡고 깊은 밤이었다.

  정말로, 도무지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오늘 같은 밤. 잠에서 깨어 버린 주인을 맞이하며 발치를 훑는 흰 고양이가 없으니 신발도 없이 맨 바닥을 밟는 발이 유난히도 시릴 뿐이다. 책상 저 아래 두었던 작은 상자를 꺼내어 작은 불 하나 켜 둔 채 어린 풋내 가득한 편지들을 하나하나 꺼내 읽어 보았다. 훌쩍 자라버린 몸으로, 잠 오지 않는 현실을 부정하며 슬픔이라고는 모르던 지난 기억들에 소리 없이 깊이 빠져 버린다. 웃음이 나다가, 문득 눈물이 고인다. 아무 일 아니라는 마냥 고이는 눈물 하나 닦지 않고 겨울 공기에 말라 버리기를 긴 시간 두어 기다리기만 한다. 자신의 불안정함을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참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절대 최선이 아닐 법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 전부.
  정말로, 도무지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펜을 손에 쥐었다. 그렇게 어쩌면 영영 발신될 일 없는 편지들이 또다른 상자 속에 쌓여간다. 누구에게도 들킬 수 없었다. 여차하면 전부 태워버릴 생각이었으니까. 수신인 쓰여 있지 않은 편지, 첫 문장 시작하지도 못한 채 펜촉이 한참 허공을 머무르다 둥그런 점을 만든다. 잉크가 샌다. 어쩌면 할 말은 흘러 넘친 잉크 속에 모두 들어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달이 한 뼘 기울었다. 눅눅해진 편지지 위에 첫 문장을 쓴다. '잘 지내?' 의례적으로 하는, 그렇기에 가장 묻고픈 말 한 마디. 그렇게 또 한참을 머무른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다.



잘 지내?

보고 싶어.

  이전에도 말한 적 있는 것 같아. 방 크기 자체가 그렇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내 방이 조금 크긴 하지.- 이상하게 네 빈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곁에 사람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쓸쓸한 일인지 이전에는 미처 몰랐어. 들리는 것이라고는 조금 거슬리는 내 숨소리와, 바람 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가 전부야. 이렇다 할 대화 상대가 있는 게 아니니 요즘은 말도 더 줄어버린 것 같아. 부모님과 하는 대화는 언제나 똑같은 것들 뿐이고, 요즘 만나는 사람들은… 별로 나와 취미가 맞는 것 같지 않거든. 대화라고 부를만한 걸 나누는 건, 드물게 나누는 편지가 전부인데 마음 놓고 편지를 보낼 수도 없어서 조금 답답해. 그냥 내가 답답하다는 거야. 너도 답답하겠지만, 미안해. 연락 끊기지 않도록 하루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내고 싶긴 하지만… 아버지께서, 좋아하지 않으시더라고. 미안해.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어. 미안해. 내 무력함을 하루하루, 새롭게 깨달아가고 있어. 아버지가 네게 손을 뻗을까 두려워. 난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데, 이보다 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나는, 나는 어떻게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 아직 죽지 않으니 살아있는 게 맞겠지만, 되려 하루하루 죽어가는 기분이 들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써봤자 나는 또 편지를 보내지 않겠지. 보낼 수 없겠지. 그러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네가 몰랐으면 해. 평생.
  바다에 가고 싶어.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바라던 미래 말이야. 나는 한적한 바닷가가 보이는 곳의 집에서 살고 있고, 적어도 그 때의 나는 혼자가 아니리라는 꿈. 언젠가는 이루어지겠거니, 하고 기약 없는 미래를 자꾸 상상하게 돼. 누가 내 옆에 있든, 맞아, 내가 편히 여겨 좋아하는 사람일 테고.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는… 그런 생각을 했어. 조건에 너무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 같다는 생각 들지 않아? 네가 바닷가를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 너는 여전히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날 테지만… 호그와트에서 지내던 시절처럼 같은 공간에서 잠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서 서로의 얼굴을 가장 첫 번째로 보고, 식사를 하며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잘 상상이 가지 않는 하루를 보낸 후에는 또다시 같은 곳에서 밤을 맞게 되겠지.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도무지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아….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짧은 연락을 할 수조차, 너를 보러 직접 갈 수조차 없는 내가 원망스러워질 정도로. 사실 나 매일 울어.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이런 말 하면 좋아하지 않겠지. 매일 밤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 무너지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아직 나는 많이 부족한가봐. 조금 더 용기가 있었으면, 조금 더 스스로에게 당당했으면, 조금 더 건강하고 단단했으면 이러지 않아도 될 텐데. 같은, 후회만 가득이고….

  역시 이 편지는 네게 보낼 수 없겠어. 새벽이라서 그런가봐. 이상하게 감성적이네.

  그래도 말이야, 나는 꽤 잘 지내고 있어. 요즘은 그렇게 아프지도 않아. 최근에 약의 배합을 조금 바꿨는데 꽤 잘 듣고 있는 것 같거든. 프림이 그리운 건 매한가지어도, 예전만큼 슬프지도 않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고, 아버지 몰래 그린고트에 계좌도 하나 만들었어. 언젠가 혼자 살게 될 때를 위한 대비책이라고는 해도… 아직 돈을 많이 모으지는 못했어. 여전히 집 정원에는 꽃이 피어. 어머니가 사랑하시는 장미만 한가득이지만, 그래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꽤 기분이 좋아지니까. 보존 마법을 걸어 두어서 겨울에 눈이 내려도 여전히 만개한 상태 그대로야. 눈이 쌓인 장미도 아름다워. 하지만 어쩐지 조금은 어색하더라. 겨울이면 지고, 여름이면 피어나는 자연 그대로의 꽃을 보고 싶은지도 모르겠어. 시간이 지나면 지나는대로 피어나고, 시들고, 꽃이 떨어지고… 하는 모습 말이야.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거니까.

  아, 눈 내린다. 네가 있는 곳에도 이곳처럼 눈이 내리고 있을까. 졸업 이후로 벌써 몇 번의 계절이 지났는지 몰라. 내내 이 집에서만 지내다가 처음으로 바깥에 나가, 호그와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방학은 길어봤자 세 달이었지. 예전에는 그 세 달도 너무 길어서, 견디기 힘들었는데. 세 달은 커녕 벌써 몇 달, 몇 년이 지났는지. 참 예전 일만 되새겨 보는 것 같지만, 그래. 역시 졸업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연회장에는 신입생들이 몇십 명은 더 새롭게 들어왔겠지. 우리가 7년을 쓰던 방에도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왔을까. 어떤 아이들이 들어왔을지, 상상해본 적 있어? 나는 가끔 궁금하더라. 이름도 얼굴도 모를 그 아이들도 호그와트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 너처럼 공부하느라 밤 새는 룸메이트가 언제 들어오나 시계 보며 기다리다가 깜빡 자 버리는 아이가 또 있지는 않을지.
  조금 더 많은 추억들을 만들어 둘 걸 그랬어. 생각보다 7년이 짧아. 하나하나 되새기다 보면 금방이어서, 되짚어 볼 것들이 더 남아있지 않아 아쉬워져. 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어도 나는 만족하지 않고 있었을지도 몰라.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 1학년 때, 고집을 부려서라도 같이 바다에 갈 걸. 조금 더 일찍부터 크리스마스 휴일에 학교에 남아 있을걸. 방학 동안에도 너를 자주 만났어야 했는데, 같은 생각들 말이야.

  봐, 나는 또 이러지. 계속 과거만 되짚고 있어. 매 순간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다른 곳에 있었을까. 조금 더 자유롭고, 내가 바라는 것들을 원하는대로 행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무의미한 상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리 가정을 해 보아도, 지금의 나는 이곳에 있을 뿐이니까. 과거는 그만 생각할까. 바라는 미래를 계속 생각해볼까. 어머니와 아버지를 상처입히게 될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선택으로 이 집을 나가서, 바닷가에 도착해서 하늘을 보고,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서……. 



  펜을 멈추었다. 이어지는 문장을 쓰지 못하고, 가늘게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또다른 짙은 점 하나를 편지지에 새긴다.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이 맑다. 어설프게 닫힌 커튼 너머로 옅은 새벽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펜을 놓고, 잉크 뚜껑을 덮는다. 수신인 쓰여지지 않았듯 발신인 또한 적히지 않았다. 잉크 덜 마른 편지지를 무작정 작은 박스 안에 넣어 놓는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서. 완성되지 않은 문장에 자꾸만 시선이 닿는다. 커튼 사이로 흘러 넘치듯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잠은 자지 못 했건만, 정신이 맑다. 허공 바라보는 눈동자가 언제 도달할지 알 수 없는 미래를 훑기 시작한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서, 가장 먼저 안아달라고 해야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잘 지냈냐는 질문을 할 거야. 잘 지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럼 너도 똑같은 질문을 할 테니, 웃으며 나도 잘 지냈다는 대답을 해야겠다고. 가장 중요한 것, 절대 울지 말아야지. 어디까지나 웃는 모습으로 너를 반겨 웃는 모습으로 그 날을 마무리할테다. 네가 보고 싶었지만 견딜만 했어. 외로웠지만 울지 않았어. 혼자서도 살만한 것 같아. 충분히 스스로 견딜 수 있던 것 같아. 그러니 너는 나를 걱정할 필요 없어. 봐, 나는 잘 지내고 있잖아. 하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재회를.

  …할 수 있을까?
  언젠가의 미래에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그리움이 한 사람을 향해 닿아 있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인정한다. 이 감정이 무엇에 연루되어 있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 흐르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도 결국은 흐르기 마련이다. 해가 뜬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서, 웃는 얼굴로 마주할 수 있을, 아직은 차마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기다린다. 여전히 괜찮지는 않았으며, 잘 지내는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은 후련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창백한 빛의 하늘이 꼭 바다 같다. 하늘을 유영하는 고래 모양의 구름이 손 끝에 닿을 듯 가까워서, 눈 내리는 하늘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어떡하지. 보고 싶다. 대책 없는 그리움이 쌓인다. 지금은 그저 모아두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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