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장



(@cm_cepp 님의 커미션입니다.)

이름 유리디스 P. 언더우드 (Eurydice Primrose Underwood)
나이 28세
성격 [변치 않을 다정함] [침묵하는] [공허한] [위태로운]
  
기타사항
1. 본래의 이름은 유리디스 P. 로보루스(Eurydice Primrose Roborus). 20세기 중반의 영국 마법사 사회, 극단적인 순수혈통 우월주의 사상을 지지하는 사랑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가족을 제외한 타인을 만나지 않은 채 외부와 단절된 유년 시기를 보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만 열한 살이 되어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한 이후가 처음, 후플푸프 기숙사에 배정되어 7년 간의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된다. 부모님은 변함없이 머글과 머글본 마법사 등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지니고 그들을 배척하고자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여러 친구들과 교류하고 지내며 유리디스 그 자신의 생각은 점차 변화하게 된다. 그들의 생각이 명확하게 옳지 않다 판단하게 된 것은 졸업 학년 직전의 방학 즈음.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이후 그와 같은 길을 걷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바람을 충족시킬 수 없으리라 어렴풋이 느끼게 되며, 부모님의 뜻과 올바르지 않은 관념에 묶이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보내고자 가출 아닌 가출을 결심하게 된다.
1-1. 7년 간의 학창 생활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공유한 이가 있다면 그건 단연코 한 사람 뿐, 퀸 퍼듀가 유일했다. 기숙사 배정 이후 2인실에서 함께 지내게 된 7년 동안의 룸메이트. 유리디스 로보루스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가족을 잠시간 멀리하고, 4학년 이후로부터 크리스마스 방학 2주 동안 본가에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 남게 된 유일한 이유. 행복하기 마련인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그를 넓은 방 안에 홀로 두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로 가족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고르게 되었다.
1-2. 순수혈통 우월주의 사상을 지지하는 로보루스 가문은 순수한 마법사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암묵적인 근친혼을 일삼아왔다. 무차별적인 근친혼의 부작용은 같은 피를 공유하는 이들의 유전병으로 이어지게 된다. 유전병은 로보루스 가문에 있어 각 정도가 다른 폐병으로 발발해왔다. 단순한 고질병인줄 알았던 자신의 병이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14살 즈음이었으며, 16살이 되어 병의 발작이 일어 한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에 따른 공포와, 순수혈통 자체에 대한 의구심, 기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부모님과 가문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된다.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디스 로보루스는 그의 부모님을 원망하지 못 하여,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결심한 것과 달리 모질고 독하게 가족을 벗어나지 못 하고 차일피일 독립을 미루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2. 1964년 겨울, 차일피일 미루던 독립을 시행하게 된다. 호그와트 졸업 이후 3년의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아버지에게 자신은 그와 뜻이 다르다는 생각을 전했다. 아버지는 크게 분노하며 그를 가두었다. 어머니의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 아버지 몰래 집을 나와 가출 아닌 가출에 성공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와 함께 종종 얼굴을 비추던 학회가 있었으나 그 시점 이후로는 유리디스의 행적이 보이지 않아, 그의 약한 몸을 아는 이들은 유리디스 로보루스가 혹 죽은 것이 아니냐는 소문을 무심코 퍼뜨리게 된다. 도망친 유리디스가 도착한 곳은 친우의 손을 빌려 도버의 해안가에 준비해놓은 작은 집이었다. 도버의 해안가, 이후 가명을 사용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떠한 소문이 도는지, 자신에 대한 소문이 났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 소문이 난 것처럼 죽은 양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살 생각이었다.
2-1. 다만 예외가 있었다면 자신의 결심을 처음으로 말하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약속했던 한 사람이었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소식과 도버 해안가의 집을 알리지 않았건만, 모르는 척 잠적하여 소식 감추는 일을 퀸에게는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찾는 편지에 답신을 보냄으로써 졸업 이후 약 4년, 재회하게 된다.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었던 자신의 감정에 대해 명확한 자각을 하게 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이기적인 욕심이 섞인 감정을 언제부터 그에게 품고 있었나 묻는다면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다. 허나 이미 오래 전, 4년 간의 공백이 자리하기 전부터,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다만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을 자각하게 된다. 
2-2. 도버의 바닷가에서 소소한 포션 판매업을 하며 생활하게 된다. 그렇게 지내게 된 몇 년의 시간들. 1966년, 일 관계 상 알고 지내던 머글 태생 마법사 부부에게서 반강제적으로 그들의 어린 아이를 떠맡게 된다. 곧 돌아오겠다며 신신당부를 하고 떠난 부부는 그 길로 아이를 되찾으러 오지 않았다. 반 순수혈통 우월주의 활동을 하던 이들이 어디선가 연고 없이 죽어버렸으리라, 비관적인 예상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라이라 언더우드(Lyra Underwood). 어쩔 수 없이 떠안게 된 아이였다지만 모른 체 보육원에 아이를 넘기고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낯선 육아에 헤매기도 잠시, 어쩌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도 자신의 곁에 있는 어린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평생 아이 가질 일 없을 테니 이것이 부성애인지, 무엇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독립 이후 성을 쓰지 않고 지내던 와중, 아이의 뜻에 따라 유리디스는 아이를 따라 그의 성을 언더우드Underwood라 스스로를 지칭하게 된다.
2-3. 세간의 흐름을 모르는 척 하며, 가문에서의 독립 이후 그 흐름에는 절대 발을 담그지 않은 채 지내자 결심했던 때도 있다. 거대한 흐름에 맞설 힘도 없으며 그에 따른 용기도 자신에게는 부족하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으니, 그에게는 자신의 손으로 어떻게든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순수혈통 우월주의의 흐름이 더 강해지는 사회를 외면하며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학창 시절이 그러했듯 사랑하는 아이도 또한 행복한 기억만을 안고 지내길 바라고 있었다. 흐름에 맞서는 작은 단체에 들어간다. 1971년,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단체의 일원으로써 혁명에 참여한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라이라를 맡기고,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오겠다 아이에게 맹세했다. 돌아오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3. 전쟁은 약 2주 간 진행되었다. 애초의 흐름이 혁명하는 이들에게 오지 않아, 시작부터 패전의 빛이 짙은 싸움이었다. 기적을 바랐지만 이도 또한 바람일 뿐이었기에 예상과 달리 흐름이 방향을 트는 일은 없었다. 혁명을 주도한 이들의 패배였다. (*트위터 자캐 커뮤니티 '니케의 기록' 오피셜 엔딩입니다.)
3-1. 여전히 당연하게도, 퀸은 같은 뜻을 품고 자신의 곁에 있었다. 몇 년 전 자연스럽게 자각했던 자신의 감정은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 내면을 이루고 있었다. 도망칠 일이 생기더라도 그러지 않으리라, 도망칠 수 있더라도 끝까지 맞서 싸우리라. 몇 년 내내 봐 왔던 모습이 그러했듯 여전히 퀸은 그 다울 것이라고, 누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전장 속 가까스로 죽음을 피한 채 찾아온 얼굴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죽음이 두려워진 것은 처음이었다. 운이 좋아 첫 번째 고난은 넘겼지만, 그 행운이 내내 지속되어 이 전쟁 어딘가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퀸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순간, 참을 수 없는 공포가 일었다. 돌아온 퀸을 붙잡고 무작정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었다. 죽음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 말이 그러한 그의 결심을 잠깐이나마 흐트러뜨릴 수 있기만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네가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면 나도 또한 그러리라, 전쟁 속 너와 나의 죽음을 목전에 두어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다 함께 죽으리라, 꿈 같은 생각을 홀로 맹세했다. 오래지 않아 사랑한다는 말은 되돌아왔다. 너의 감정이 나와 같이 이기적인 욕심을 동반한 감정일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3-2. 혼자만의 맹세를 할 적, 고려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신을 이 곳으로 오게 만든 그 아이었던지라 혼자만의 그 맹세는 끝내 지켜지지 못 한 채 무산되었다. 전쟁의 끝은 혁명의 실패였다. 목숨 부지한 채 머물러 있어도 그 끝은 죽음 뿐이리라. 너와 같은 죽음을 맞이해야지, 포기와도 같은 마음을 먹으며 머릿속을 스친 것은 자신을 내내 기다리고 있을 어린 아이였다. 라이라.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미 부모의 상실을 겪은 그 아이에게 똑같은 경험을 줄 수는 없었다.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끝까지 맞서 싸우는 퀸을 전장에 둔 채 자리를 떴다. 함께 있겠다고 했으면서 네 마지막 모습조차 눈에 담지 못 했구나. 죄책감과 죄악감이 한데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이 속을 온전히 채우고 있었다. 도버의 바닷가로 돌아와 아이를 안아주며 울며 말했다. 돌아왔어, 하고. 평생 이 아이만을 위해 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3. 아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영국을 벗어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사람 적은 곳에 자리잡아 일상이라 부를 것을 조금이나마 되찾고 나니 함께 보내자 약속했던 크리스마스는 지나 1972년의 새해가 밝아오더라. 퀸이 선물해 주었던 목걸이는 보는 것조차 버거워 서랍 속에 꼭꼭 숨겨 넣어 두었다. 견디기 힘들어 아무것도 어깨 위 얹고 있지 않은 양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무너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머릿속 사고체계가 단순해져갔다. 봄 같지도 않은 봄을, 여름 같지도 않은 여름이 지나,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이 되어서야 간신히 그의 흔적을 되짚을 여유가 한 줌 생겼다. 집 근처의 또래 아이들과 썩 괜찮게 지내며 웃고 떠드는 라이라를 보니 차라리 이 편이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도 했다. 마법 사회에 완전히 섞여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 한 채 어중간한 위치에서 일상을 영위하며 살고 있었다.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가 않다, 라는 말은 이러한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구나. 간신히 호흡하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4. 홀로 도망친 스스로를 용서하기도, 퀸을 잊기에도 한참은 부족한 시간이었다. 겨울이 왔다. 도망친 그 때로부터 겨우 1년을 채운, 짧은 시간. 크리스마스가 머지 않았다. 근 1년간 네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마음 한 구석에 놓인 무겁고 축축한 것이 내내 사라지지 않고 자리해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오지 않았으면 했다.
  
4. "이번 크리스마스에 바쁠까, 퀴니. 도버로 와. 같이 보내자, 오랜만에. 라이라도 널 보고싶어 해."
4-1. 지팡이는 잘 쓰지 않는다. 서랍 안에 넣어둬 잘 꺼내지 않은 채, 머글의 것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영국에서 넘어올 적 그린고트에 넣어 두었던 돈을 모두 꺼내 달러로 환전해 사용 중이다. 아직까지는 돈이 부족하지 않다.
4-2. 라이라는 머글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엄금시키고,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친구도 많이 생겼다는 것 같다.
4-3. 미약한 불면, 불규칙적인 생활 패턴.
4-4. 감정 기복이 잦았으나 드러낸 바 없다.
4-5. 라이라의 생일도, 추수감사절도 지내었지만 크리스마스 트리만은 차마 준비할 수 없었다.

페어와의 관계 (*기타사항에 서사가 다수 서술되어 있습니다.)
  낯선 세상, 기꺼이 접하게 된 새로운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 가장 가까운 곳에 언제나 그가 있었다. 가족을 제외하여 완벽한 타인과 몇 년 내내, 같은 생활 공간을 나누어 사용하며 그 모든 시간들을 함께 보내게 되는 이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나 뿐인 룸메이트에서 시작하여, 가장 친한 친구,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말을 감히 맹세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계기도, 큰 동요도 하나 없이 그에 대한 생각은 천천히 변화해간다. 분명한 선을 그어 사랑의 종류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하였으며, 여전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감정이 다른 것들에 비해 특별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네가 그 곳에 있었으며, 다만 그것이 너였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내가 너를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 말하지만 너도 또한 나를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지. 어쩌면 그건 평생 변하지 않을 사실일 거야. 
  그렇게 그는 자신이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는 단 하나의 안식처가 되었다. 허나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두어 안식처라 할 수는 없으니, 공란으로 비워 둘 수밖에 없다. 그에게 사랑을 말했으며 같은 사랑의 단어를 하여 말이 돌아왔지만, 그 말이 자신과 같은 욕심을 뜻하는 것인지 더이상 물어볼 수조차 없다. 잊을 수도 없고, 애써 기억해 되새기기도 버거웠기에 이도저도 못한 채 어중간한 위치에 머무른 현재의 자신처럼 어중간한 무게가 되어 마음 한 켠이 짓눌리고 있다. 누구를 잃었습니까, 누군가 묻는다면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고, 할 수 있는 건 그 단순한 대답 뿐이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두어 이기적으로 욕심을 부려 사랑하는 사람이라 칭할 수는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상실감을 겪고 있었다. 무엇 하나 후회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감정들이 평생의 업보처럼 자신을 따라다닐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  *  *

1차 지인 계정 @fdre119 (쟘님)
오너 생년 및 오너 계정 성인(94) / @HN_B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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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불면을 앓았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만 사람의 소리 얼마간 들리는 것보다 아주 고요한 것이 오히려 잠을 더 쫓아내기 마련이라고,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방 안에 쌓여 있는 어둠은 좀처럼 그 침묵을 거두어내지 않았다. 그럴 때면 버릇처럼 과거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허공에 꺼내 보고는 했다. 온기 어린 공간 속 비주기적인 소음을 내며 타오르는 벽난로의 잔상과, 불특정 다수가 만들어 내는 펜촉의 소리들과, 작은 소동물이 카펫 깔린 바닥을 돌아다녀 남긴 흔적들, 문 닫지 않고 잠에 빠져들면 어느새인가 방에 들어와 멀지 않은 옆자리를 채우던 타인의 온기까지. 돌아갈 수 없기에 과거라 부르는 것이다.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그립고, 그것 그리는 습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추울 리 없는 방 안에 한기가 어린 듯 하다. 이불을 끌어모아 턱 끝까지 올려 덮어 보아도 오한이 가시지 않는다. 손 끝보다는 명치가 시렸다. 
  모를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외로웠다. 입 밖으로 내어 뱉으면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 혼잣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끌어안고 있으면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사라져 좋을 것 하나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기한 없는 바람만을 수없이 되뇌고,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를 끊임없이 꿈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창 밖으로 얼핏 보이는 달이 한 뼘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밤이 길다. 오전의 태양이 영영 떠오르지 않을 것처럼 어둡고 깊은 밤이었다.

  정말로, 도무지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오늘 같은 밤. 잠에서 깨어 버린 주인을 맞이하며 발치를 훑는 흰 고양이가 없으니 신발도 없이 맨 바닥을 밟는 발이 유난히도 시릴 뿐이다. 책상 저 아래 두었던 작은 상자를 꺼내어 작은 불 하나 켜 둔 채 어린 풋내 가득한 편지들을 하나하나 꺼내 읽어 보았다. 훌쩍 자라버린 몸으로, 잠 오지 않는 현실을 부정하며 슬픔이라고는 모르던 지난 기억들에 소리 없이 깊이 빠져 버린다. 웃음이 나다가, 문득 눈물이 고인다. 아무 일 아니라는 마냥 고이는 눈물 하나 닦지 않고 겨울 공기에 말라 버리기를 긴 시간 두어 기다리기만 한다. 자신의 불안정함을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참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절대 최선이 아닐 법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 전부.
  정말로, 도무지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펜을 손에 쥐었다. 그렇게 어쩌면 영영 발신될 일 없는 편지들이 또다른 상자 속에 쌓여간다. 누구에게도 들킬 수 없었다. 여차하면 전부 태워버릴 생각이었으니까. 수신인 쓰여 있지 않은 편지, 첫 문장 시작하지도 못한 채 펜촉이 한참 허공을 머무르다 둥그런 점을 만든다. 잉크가 샌다. 어쩌면 할 말은 흘러 넘친 잉크 속에 모두 들어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달이 한 뼘 기울었다. 눅눅해진 편지지 위에 첫 문장을 쓴다. '잘 지내?' 의례적으로 하는, 그렇기에 가장 묻고픈 말 한 마디. 그렇게 또 한참을 머무른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다.



잘 지내?

보고 싶어.

  이전에도 말한 적 있는 것 같아. 방 크기 자체가 그렇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내 방이 조금 크긴 하지.- 이상하게 네 빈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곁에 사람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쓸쓸한 일인지 이전에는 미처 몰랐어. 들리는 것이라고는 조금 거슬리는 내 숨소리와, 바람 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가 전부야. 이렇다 할 대화 상대가 있는 게 아니니 요즘은 말도 더 줄어버린 것 같아. 부모님과 하는 대화는 언제나 똑같은 것들 뿐이고, 요즘 만나는 사람들은… 별로 나와 취미가 맞는 것 같지 않거든. 대화라고 부를만한 걸 나누는 건, 드물게 나누는 편지가 전부인데 마음 놓고 편지를 보낼 수도 없어서 조금 답답해. 그냥 내가 답답하다는 거야. 너도 답답하겠지만, 미안해. 연락 끊기지 않도록 하루에 한 번씩 편지를 보내고 싶긴 하지만… 아버지께서, 좋아하지 않으시더라고. 미안해.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어. 미안해. 내 무력함을 하루하루, 새롭게 깨달아가고 있어. 아버지가 네게 손을 뻗을까 두려워. 난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데, 이보다 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나는, 나는 어떻게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 아직 죽지 않으니 살아있는 게 맞겠지만, 되려 하루하루 죽어가는 기분이 들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써봤자 나는 또 편지를 보내지 않겠지. 보낼 수 없겠지. 그러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네가 몰랐으면 해. 평생.
  바다에 가고 싶어.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바라던 미래 말이야. 나는 한적한 바닷가가 보이는 곳의 집에서 살고 있고, 적어도 그 때의 나는 혼자가 아니리라는 꿈. 언젠가는 이루어지겠거니, 하고 기약 없는 미래를 자꾸 상상하게 돼. 누가 내 옆에 있든, 맞아, 내가 편히 여겨 좋아하는 사람일 테고.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는… 그런 생각을 했어. 조건에 너무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 같다는 생각 들지 않아? 네가 바닷가를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 너는 여전히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날 테지만… 호그와트에서 지내던 시절처럼 같은 공간에서 잠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서 서로의 얼굴을 가장 첫 번째로 보고, 식사를 하며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잘 상상이 가지 않는 하루를 보낸 후에는 또다시 같은 곳에서 밤을 맞게 되겠지. 상상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도무지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아….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짧은 연락을 할 수조차, 너를 보러 직접 갈 수조차 없는 내가 원망스러워질 정도로. 사실 나 매일 울어.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이런 말 하면 좋아하지 않겠지. 매일 밤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 무너지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아직 나는 많이 부족한가봐. 조금 더 용기가 있었으면, 조금 더 스스로에게 당당했으면, 조금 더 건강하고 단단했으면 이러지 않아도 될 텐데. 같은, 후회만 가득이고….

  역시 이 편지는 네게 보낼 수 없겠어. 새벽이라서 그런가봐. 이상하게 감성적이네.

  그래도 말이야, 나는 꽤 잘 지내고 있어. 요즘은 그렇게 아프지도 않아. 최근에 약의 배합을 조금 바꿨는데 꽤 잘 듣고 있는 것 같거든. 프림이 그리운 건 매한가지어도, 예전만큼 슬프지도 않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고, 아버지 몰래 그린고트에 계좌도 하나 만들었어. 언젠가 혼자 살게 될 때를 위한 대비책이라고는 해도… 아직 돈을 많이 모으지는 못했어. 여전히 집 정원에는 꽃이 피어. 어머니가 사랑하시는 장미만 한가득이지만, 그래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꽤 기분이 좋아지니까. 보존 마법을 걸어 두어서 겨울에 눈이 내려도 여전히 만개한 상태 그대로야. 눈이 쌓인 장미도 아름다워. 하지만 어쩐지 조금은 어색하더라. 겨울이면 지고, 여름이면 피어나는 자연 그대로의 꽃을 보고 싶은지도 모르겠어. 시간이 지나면 지나는대로 피어나고, 시들고, 꽃이 떨어지고… 하는 모습 말이야.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거니까.

  아, 눈 내린다. 네가 있는 곳에도 이곳처럼 눈이 내리고 있을까. 졸업 이후로 벌써 몇 번의 계절이 지났는지 몰라. 내내 이 집에서만 지내다가 처음으로 바깥에 나가, 호그와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방학은 길어봤자 세 달이었지. 예전에는 그 세 달도 너무 길어서, 견디기 힘들었는데. 세 달은 커녕 벌써 몇 달, 몇 년이 지났는지. 참 예전 일만 되새겨 보는 것 같지만, 그래. 역시 졸업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연회장에는 신입생들이 몇십 명은 더 새롭게 들어왔겠지. 우리가 7년을 쓰던 방에도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왔을까. 어떤 아이들이 들어왔을지, 상상해본 적 있어? 나는 가끔 궁금하더라. 이름도 얼굴도 모를 그 아이들도 호그와트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 너처럼 공부하느라 밤 새는 룸메이트가 언제 들어오나 시계 보며 기다리다가 깜빡 자 버리는 아이가 또 있지는 않을지.
  조금 더 많은 추억들을 만들어 둘 걸 그랬어. 생각보다 7년이 짧아. 하나하나 되새기다 보면 금방이어서, 되짚어 볼 것들이 더 남아있지 않아 아쉬워져. 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어도 나는 만족하지 않고 있었을지도 몰라.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 1학년 때, 고집을 부려서라도 같이 바다에 갈 걸. 조금 더 일찍부터 크리스마스 휴일에 학교에 남아 있을걸. 방학 동안에도 너를 자주 만났어야 했는데, 같은 생각들 말이야.

  봐, 나는 또 이러지. 계속 과거만 되짚고 있어. 매 순간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다른 곳에 있었을까. 조금 더 자유롭고, 내가 바라는 것들을 원하는대로 행할 수 있는 곳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무의미한 상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리 가정을 해 보아도, 지금의 나는 이곳에 있을 뿐이니까. 과거는 그만 생각할까. 바라는 미래를 계속 생각해볼까. 어머니와 아버지를 상처입히게 될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선택으로 이 집을 나가서, 바닷가에 도착해서 하늘을 보고,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서……. 



  펜을 멈추었다. 이어지는 문장을 쓰지 못하고, 가늘게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또다른 짙은 점 하나를 편지지에 새긴다.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이 맑다. 어설프게 닫힌 커튼 너머로 옅은 새벽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펜을 놓고, 잉크 뚜껑을 덮는다. 수신인 쓰여지지 않았듯 발신인 또한 적히지 않았다. 잉크 덜 마른 편지지를 무작정 작은 박스 안에 넣어 놓는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서. 완성되지 않은 문장에 자꾸만 시선이 닿는다. 커튼 사이로 흘러 넘치듯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잠은 자지 못 했건만, 정신이 맑다. 허공 바라보는 눈동자가 언제 도달할지 알 수 없는 미래를 훑기 시작한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서, 가장 먼저 안아달라고 해야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잘 지냈냐는 질문을 할 거야. 잘 지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럼 너도 똑같은 질문을 할 테니, 웃으며 나도 잘 지냈다는 대답을 해야겠다고. 가장 중요한 것, 절대 울지 말아야지. 어디까지나 웃는 모습으로 너를 반겨 웃는 모습으로 그 날을 마무리할테다. 네가 보고 싶었지만 견딜만 했어. 외로웠지만 울지 않았어. 혼자서도 살만한 것 같아. 충분히 스스로 견딜 수 있던 것 같아. 그러니 너는 나를 걱정할 필요 없어. 봐, 나는 잘 지내고 있잖아. 하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재회를.

  …할 수 있을까?
  언젠가의 미래에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그리움이 한 사람을 향해 닿아 있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인정한다. 이 감정이 무엇에 연루되어 있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 흐르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도 결국은 흐르기 마련이다. 해가 뜬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서, 웃는 얼굴로 마주할 수 있을, 아직은 차마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기다린다. 여전히 괜찮지는 않았으며, 잘 지내는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은 후련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창백한 빛의 하늘이 꼭 바다 같다. 하늘을 유영하는 고래 모양의 구름이 손 끝에 닿을 듯 가까워서, 눈 내리는 하늘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어떡하지. 보고 싶다. 대책 없는 그리움이 쌓인다. 지금은 그저 모아두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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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십 번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을 붙잡고 아무리 숨을 참아 보아도 정도 이상으로 뛰는 심장은 본래의 속도로 돌아가려 하지 않으니, 애써 침착한 체 무딘 낯을 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밴시의 울음 소리라고 칭한다 들었다. 나뭇잎 가르며 들려 오는 바람 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았다.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는 양 겁에 질린 표정을 감출 길이 없다. 아니다, 쫓기고 있지 않다. 아니, 아니다. 쫓기고 있다. 또다시, 아니다. …나를 지금 쫓는 것은 없다. 커다란 나무 줄기에 몸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느리게 주저앉았다. 등을 온전히 받쳐 주는 것이 있으니 안심이 되어, 점차 잦아들기 시작하는 심장을 갈무리하며 잠시간 눈을 감았다. 놓칠 새라 힘 주어 잡고 있던 지팡이를 천천히 손에서 떼어낸다.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몇 달 새 낯설어진 감각에 생경해하며, 지팡이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두렵지 않아. 

  주문 외듯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두렵지 않아. 더이상 두려워할 것은 없어. 나뭇잎 사이로 고양이 발자국 같은 달빛이 소리내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시금 몸을 일으켜 어두운 숲 속을 가로질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저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갈 생각이 없습니다."

  아침 식사 중 대뜸 내뱉은 한 문장 말이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누구 하나 무지하지 않았으니 '같은 길을 갈 생각이 없다'는 말을 들은 그의 양친은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아들의 철없는 치기라 판단하기에 그들의 아이는 이미 장성해 있었으며, 말하는 이의 표정과 목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뚜렷했으니.

"그러니 저는 독립하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달그락, 식기 내려놓는 소리가 정도 이상으로 크게 들려온다. 꼭 닮았으나 자신을 낳지 않은 아버지의 얼굴이 새파랗게 불타오르는 광경을 온전히 눈에 담으며 그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조금 더 길어지겠어, 퍽이나 태평한 생각이다.
  머글식 폭력은 경박하다며 사용하는 이들을 경멸하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멀지 않은 거리서 다가와 망설임 없이 아들의 뺨을 올려 붙였다. 지팡이를 빼앗는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라, 명하는 말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순순히 방으로 들어가니 마법을 사용하여 모든 문을 잠궈 버리는 것이, 참 온건하고도 관대한 처벌을 주는구나 생각했다. 유약한 인간의 손으로 마법 없이 파훼할 수 있는 잠금쇠가 아니었다. 여보, 여보. 잠시만요. 당황하여 안절부절 못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 온다. 방문 앞에 서서 점차 멀어지는 그 목소리들을 귀 기울여 들어 보다가, 모든 소리가 잦아든 이후 느지막이 발걸음을 떼어내었다. 방 한 켠에 걸려 있는 거울에 시선이 닿았다. 볼품없이 부어올라 있는 얼굴이 보인다. 아, 소리내어 입을 벌려보니 그제서야 아릿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뺨을 맞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따지자면, 폭력을 체험한 것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낯선 감각이다. 찌르르 울리는 고통이 낯설면서도 마냥 참지 못 할 것은 아니었기에 아무런 조치 하나 취하지 않은 채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버렸는데 기한 모를 유예가 더 늘어났다. 창문조차 열 수 없어 잠겨 버린 창틀을 몇 번 흔들어 보다, 우중충한 구름 낀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하늘이라 부르는 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상냥하다, 다정하다, 현실을 모른다. 듣기에 좋았던 수많은 형용사들을 떠올려 본다. 나는 마냥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미리 말을 해 둘 걸 그랬나. 의미 없는 생각만이 웅웅 맴돈다. 잠긴 방문 너머로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일 테다. 그러니 나는 마냥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 

"어머니."

  도리어 모르는 척 순한 얼굴을 가장하여 그 누구보다 약아빠진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자신이었다고, 미리 말을 해 둘 걸 그랬다. 여전히 의미 없는 후회일 뿐이다. 어쩌면,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들을 무척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아들이 한 발자국 바깥 나들이 하지 못 한 채 방에 갇혀 있는 것이 못내 서럽고 안타까우셨던 모양이었다. 매일같이 아버지를 설득하는 목소리를 방문 너머로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유리디스를 호그와트에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같잖은 친구 놀음에 붙잡혀 이상을 깨우치지 못 하고 철없는 소리나 하고 앉아있지 않나.' 그리 말하시며, '나는 저런 선택을 하는 이들을 잘 안다. 동정을 다른 감정으로 착각하여 저러는 것이지, 스스로 마음 깊이 반성하는 것이 아닌 이상, …….' 더이상 들을 가치가 없었다. 난생 처음으로 부모님이 레질리먼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속 깊이 안심했다.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무릎 꿇고 울며 빌 정도가 되어야 자신의 말을 조금이라도 들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달리 말해 그는 아버지의 저 올곧음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정하셨기에.

"유리, 식사는 해야지. …몸이 안 좋니? 스프를 준비하라고 해 놓을까?"

  무작정 굶기 시작했다. 무식하고 멍청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입맛 없어요. 언제나 대답은 동일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으니까요. 혼잣말은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터였다. '네가 그런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어서 아버지에게 빌어! 잘못했다고 해!' 화를 내시기도 하고, '제발 이것만 먹자, 유리.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구나, 응?' 애원하기도 하셨다. 대답은 밋밋했다. '먹고 싶지 않아요.' 그럼 죽을 생각인 거니? '그런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않아요.' 약속한 것도 있고.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고명한 순수혈통 가문의 도련님이 아사로 죽었다는 사실이 바깥에 밝혀지면 아버지도 꽤나 속 썩이시겠거니, 싶었다. 딱히 그것을 노리지는 않았지만서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허나 아버지의 믿는 바를 따르려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거니 생각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 몸은 그 고명한 뜻에 의하여 죽음에 가까워진 나약한 육체였다. 눈총을 살 정도로 무식한 고집이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본다. 바라는 것은 나 자신의 죽음이 아니었다. 나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었으며, 육신은 좁은 방 안에 갇혀 있건만 정신은 이미 저 하늘을 떠돌고 있기에 몸 무거운 속박은 속박으로 자리할 수 없었다. 

"어머니."

  말라붙은 숨으로 애원하면.

"…나가고 싶어요."

  나를 사랑하는 당신은 그 요청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그 사랑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챈다. 자신이 그렇기에, 다른 이들도 그러리라 쉬이 판단하고 살아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한참 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 이 사람은, 나의  뜻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손 끝이 떨려왔다. 아직은 견딜 만 했다. 흔들리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정의롭고 올곧은 뜻을 지닌 사람만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용기 있는 사람만은 못 되어, 이것이 아닌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설득하며 납득시키려 수없이 자기합리화를 반복할 뿐이다. 상처 받은 얼굴이 보인다. 이기적인 나를 용서해주세요. 아니,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무 말 할 수 없어 몇 주만에 자신에게 되돌아온 지팡이를 힘 주어 잡아 볼 뿐이었다. 손이 가늘게 떨린다. 눈이 빛났다. 뒤돌아 자리를 뜨려는 당신을 불러 세웠다.

"…어머니."

  무엇인가 비틀어지는 소리가 난다.

"사랑해요."

  변함없이. 어쩌면 앞으로도 내내 변하지 않을 영원함으로. 

"먼저 갈게요."

  가장 먼저 이 지팡이를 부숴버려야겠다. 생각하며 벽에 걸려 있는 도톰한 망토를 걸쳐 입었다. 사랑을 볼모로 잡아 사랑하는 사람을 협박했다. 용서받지 못 할 죄란 이러한 행동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챙길 짐은 많지 않았다. 저 먼 곳으로 사라지는 어머니의 발소리를 음악 삼아 책상 서랍에 넣어 놓은 물건 몇 개를 마구잡이로 가방 속에 집어 던졌다. 쪽문을 통해 집을 나섰다. 스쳐 지나가는 담벽 아래, 언젠가 속수무책으로 잃어버렸던 작은 생명의 비석이 낮게 자리한 것이 보였다. 잘 있어, 프림. 마지막 인사를 한다. 꽃봉오리조차 맺히지 않은 장미 덩굴이 비석을 바닥 삼아 그 발을 딛어 오르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꽃이 피어나겠지. 어머니의 손길이 닿은 장미 화원은 틀림없이 아름다울 테다. 다시는 장미를 그리지 않을 테다. 몸 돌려 집을 떠났다. 어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밴시의 울음소리가 왕왕 귓가를 울렸다.


* * *

  몇 번의 순간이동을 반복하여, 까마귀 몇 마리 날아다니는 것이 고작인 다이애건 앨리의 구석진 거리. 망토를 푹 눌러 뒤집어 쓴 이는 푸른 보석 달린 지팡이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망설이듯 몇십 분 동안을 그와 비슷한 자세로. 지팡이는 흔적을 남긴다. 조금의 권력을 사용하여 마법의 흔적을 추적한다면, 아버지가 자신을 금방 찾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지팡이를 꺾어 내리는 마법사는 많지 않겠지.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지팡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뚝, 섬뜩한 소리가 났다.
  약 10년을 함께 한 사과나무 지팡이는 거짓말처럼 부러져 버렸다. 아니, 부러뜨렸다 칭하는 편이 더 옳을 테다. 뚝 부러지며 짧은 생 마무리하는 모습이 꼭 그 운명에 순응하여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서, 나무 부러진 조각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잔해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가 물려 주었다는 보석도 어김없이 땅 속에 묻혔음은 당연한 사실. 망토를 깊게 뒤집어 쓴 채 다이애건 앨리의 지팡이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나절 첫 손님이 될 이는 그렇게 같은 자리에서 두 시간을 서서 기다렸다. 아침을 여는 사람들의 소란이 들린다. 졸음 덜 깬 지팡이 장인은 느지막이 가게의 문을 열었다.
  두 번째 지팡이를 맞이하는 마법사들의 수는 생각보다 적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성장'이라 부르지요. 그러니 부디 다가올 새로운 시간들을 기쁘게 맞이하기를 바란다고, 지팡이 장인은 망설임 없이 이것을 그에게 건네 주었다. 아주 유연하되 고집스런 나무로 만들었다는 새로운 지팡이. 이것은 휘어질지언정, 더이상 부러지지는 않을 테다. 새로운 지팡이의 감각이 못내 낯설 뿐이다. 가진 것은 얼마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지 않고, 장소를 몇 번 더 이동하여…….


  문득 참기 힘든 외로움이 온 몸을 덮쳐 왔다. 난생 처음 보는 바다는 아름다웠으며, 고요했고, 다시 없을 만큼 공기가 시려웠다.


* 공미포 390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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